두어 주 전 이웃집 반려견이 내 닭 세 마리를 물어 죽였다. 그 녀석을 ‘이뻐하여’ 밥도 주고 쓰다듬으며 자만심을 갖게 만든 우리의 잘못이 컸다. 뜻하지 않은 견환(犬患)에서 목숨을 건진 나머지 일곱 마리도 충격이 컸던 것일까. 주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알도 낳지 않았다. 넓적다리를 물린 수탉은 시시때때로 토하던 득음(得音)의 계명성(鷄鳴聲)을 멈추었다. 잘 보호해 주지 못한 죄책감에 아침마다 녀석들을 만날 때마다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할 뿐, 달리 위로할 말이 없었다.
처음 녀석들을 만날 때, 나는 약속했다. ‘백 살까지 함께 하겠다’는 다짐이었다. 닭이 30-40년을 산다는 말을 듣고 우리의 나이를 고려할 때 그 약속은 일견 타당했다. 그러나 그건 자연 생태계의 실상을 모른 순진한 발상이었다. 약육강식의 촘촘한 먹이사슬로 이루어진 것이 생태계의 본질이다. 닭은 ‘힘없어 대책 없는’ 평화주의자들이다. 기껏 먹는 것이라곤 곡물이나 음식 찌꺼기, 풀 등이고, 가끔 닭장 문을 열어주면 땅속에서 꼬물대는 지렁이나 땅 위에서 맴도는 풍뎅이를 쪼아먹곤 ‘오늘 땡잡었네~!’하며 만족해하는 녀석들이다. 그러니 자연계에는 닭을 노리는 맹수(猛獸)와 맹금(猛禽)들이 ‘천지 삐까리’다.
녀석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견환을 당하고 풀 죽어 있는 녀석들을 보는 것도 고문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단했다. 좀 더 나은 환경으로 보내주기로 한 것. 이웃 동네 펜션의 유 사장에게 연락했고, 녀석들을 받아줄 사람을 수소문하여 알아낸 그가 친구 한 사람과 닭들을 인수하기 위해 즉시 찾아왔다. 자루에 담겨 트럭 짐칸에 실린 녀석들과 작별의 인사를 했다. ‘어딜 가든 행복하게 잘 살아라!’는 말이 전부였다. 녀석들이 먹다 남은 사료 한 푸대를 짐칸에 실어주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매 순간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닭들이 어찌 자신의 운명을 예견할 수 있을까. 그러니, 살아있는 순간이라도 편하고 안락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살아있는 것들과 공존하며 ‘에코팜’의 이상을 실현해 보겠노라는 내 포부가 피할 수 없는 현실에 점점 무너져 가는 요즈음이다. 인간 자신이 최상위 포식자임을 확인하며, 어디로 보낸 들 ‘학살의 덫’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닭들의 운명을 절감한다. 아침마다 신선한 음식으로 가득 찬 먹이통을 들고 올 주인을 기다리며 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녀석들. 그들을 어디론가 떠나보내며 몹시도 ‘응크지근해지는’ 저녁 무렵이다. 나는 ‘살아있는 게 죄’라는 인식의 굴레에서 언제쯤이나 해방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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