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와의 약속>>을 읽고 보내온 최건수 박사의 평

오동나무와의 약속을 읽고

최건수 박사​

저자의 집에 동네의 명물이 된 오동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는 오동나무에게 ‘네가 늙어 혼자 서있기 어려워질 때 네 몸을 잘라 시집가는 손녀의 장롱을 만들어 주었으며 하는데 괜찮지?’라고 물어보자, 오동나무는 흔들리는 가지로부터 ‘그러엄, 기쁘게 내 몸을 내어 줄게’라고 라고 하는 대답을 그는 듣는다.

오동나무와의 약속에서 저자와 오동나무와의 위와 같은 대화는 두 가지 세계관을 가진 독자로부터 다르게 접근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먼저 물질적인 세계관 혹은 과학적 세계관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오동나무가 과연 주체가 되어 미적 경험을 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을 독자는 제기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저자는 손녀에게 장롱을 선사할 마음을 가지고 있고, 이런 마음에 오동나무가 약속해 주었다고 하는 미적인 가치를 인위적으로 가져다 덧붙인 것이라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오동나무가 약속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왜냐하면 오동나무는 저자의 현실세계 안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단지 마음속으로만 존재하고 현실에서는 없는 사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아닌 무의 존재, 오동나무에서는 주체가 발견될 수 없고, 이에 따라 오동나무와의 약속은 주체인 저자의 일방적인 경험일 뿐이라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유기체적 세계관의 관점이 있다. 이러한 관점은 물질적인 관점을 반영하면서도 물질을 인간과 대등한 존재로 간주한다. 그래서 독자는 오동나무가 약속을 했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여, 저자에게 오동나무와의 약속이 사실인 것처럼, 오동나무에게 저자와의 약속도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동나무와의 약속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통사실이 된다. 공통의 사실이라는 말은 현실세계는 저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자와 오동나무를 동등한 성원으로 하여 구성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동나무와의 약속’이라는 명제의 논리적 주어는 저자일 뿐만이 아니라 오동나무도 주어가 될 수 있는 것이며, 더 나아가 저자와 오동나무의 현실세계는 주체가 대상을 지배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동등한 민주주의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오동나무는 저자에 비하여 의식이 미약하기 때문에 그 약속을 저자가 대신 ‘오동나무와의 약속’이라는 명제로 나타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기체적 세계관은 오동나무와의 약속을 참과 거짓으로만 판단한다면 그것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독자는 오동나무가 그 약속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판단(사고)으로서가 아니라 느낌(감정)으로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오동나무가 약속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지시가 아니라 하나의 유혹으로 독자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 유혹이 흥미롭다고 설득되고, 느껴짐으로써 독자가 이것을 미적으로 받아들인 이후에 가서라야 그 명제가 참인가 거짓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처음부터 참과 거짓이라는 판단에만 천착한다면 독자는 오동나무의 아름다움, 미적 가치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다.

유기체적 세계관에서는 오동나무의 생명(혹은 주체)을 세 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첫째는, 생명의 이상적인, 형식적인 가치이다. 이것은 오동나무 뿐 아니라 자연에서 무엇이든지 생명은 그자체로서 자유롭게 자신의 욕구를 지닌다는 것이다. 둘째는, 오동나무의 생명이다. 이것은 자아와 동등한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타자의 가치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의 가치 혹은 자아의 생명이다. 이것은 자아가 자연의 모든 생명을 함께 드러내어 나타낸다는 데에 그 본질적인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생명은 하나의 이상으로서 존재하고 또는 오동나무라는 타자로서 존재하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저자의 인생과 유기체적으로 나눠질 수 없다는 데에 그 본질적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저자는 책의 어느 곳에서 호접지몽을 가끔 비유로서 이야기 하고 있다. 장자가 나비가 되어 꿈속에서 날아다니기도 하고, 나비가 장자가 되어 꿈속에서 살아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체가 서로에게 들어가 있어 하나의 존재로서 나눠질 수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동나무와의 약속을 접하는 저자의 손녀나 혹은 독자는 시집가는 손녀에게 장롱을 만들어 주겠다는 저자의 생각 속에서 손녀에게 유기체적세계관을 선물로서 물려주려는 깊고, 새롭고, 신비한 뜻을 함께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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